여행기는 블로그에 쓸 생각이었다. 여기(인스타그램)에 주절대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진지하고, 길다. 유희라는 이곳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블로그의 비밀번호를 찾기 위한 문의에 대한 답은 연휴 이후에나 올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아마 여기에 남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긴 여행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라고 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블로그에 올림 ㅎㅎ)
둥그런 빵에 끼운 살라미 네 장, 체다 치즈 한 장, 매운 소스 조금. 이 샌드위치 두 개. 아니면 컵라면.
이게 내 끼니였다. 잠은 이틀은 텐트에서, 하루는 산장에서 잤다. 처음부터 이런 궁상맞은 트레킹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하는 장거리 트레킹이기 때문에 체력에만 집중하고 싶어 식사나 잠자리는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마저 참거나 타협하기에는 더 어린 시절의 내가 조금은 가엾지 않은가. 임박해서 예약 하다보니 편하게 잘 수 있는 산장은 이미 매진 되었고 어떤 곳은 캠핑 자리만, 또 어떤 곳은 캠핑 시설만 남아있던 게 내 투지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아예 헝그리로 가자, 라고. 면도를 하지 않은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뒷짐 지고 동네 앞산을 몇 시간만 걸어도 늘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 하물며 자의적인 등산은 양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해본 인간이 분수에 맞지 않는 패기, 혹은 치기만 믿고 하루 8~10시간씩, 3박 4일을 산길을 걸어다녔으니 온갖 잡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말도, 음식도, 사람도, 생활양식도 모두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때로는 제 몸뚱이만한 가방을 짊어지고 말이다.
아마도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일 것이다. 결혼관을 확립한 이후로 지금까지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결혼은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찾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만인이 유쾌해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구나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것은 산타가 머리맡에 놓고 가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는 조금 다른 것이어서,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원한다면 선물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취하는 것이 가능하고, 어쩌면 이것이 사회 곳곳에 고여있는 슬픔의 원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 여행을 지지하는 두 개의 큰 축 중 하나는 새로운 경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딸 셋을 데리고 아마존에 온 캐나다 부부를 여행길이 아니라면 또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딸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원하세요, 아니요, 어떤 직업 말고요, 라는 내 질문에 부인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우리 부부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서 꼭 아이들도 여행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이미 좋아하긴 하지만. 20년 전 서울의 사진을 아직도 핸드폰에 저장해 가지고 다니는 미국 아저씨는 내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액정 안에 비친 고궁의 풍경과 평화시장의 간판이 그의 제스쳐를 따라 하늘을 이리저리 날았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했겠다 싶은 그의 아들을 내가 추켜세웠다. 아버지가 참 멋있는 분이세요, 아마 당연해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자랑으로 여기고 항상 자각을 가질 만 해요. 아들은 손에 쥔 병뚜껑을 만지작 거리다가 답했다. 알아요, 저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요.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서는 퍽 듣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의 백미라고 불리는 삼봉Las torres은 그 코스가 참 얄궂다. 다 왔나, 싶으면 또 긴 모래밭이 나오고, 다 왔나, 싶으면 또 거친 자갈길, 바윗길이 나온다. 시선은 땅에 고정하고 가파른 경사의 모래밭을 지나는데, 옆에서 예순은 족히 넘어보일 노부부가 서로 당겨주고 끌어주고 하면서 끙끙대고 있다. 성인 남성에게도 쉽지 않은 길인데,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내려갈 땐 어떻게 내려갈까, 쓸데없는 남걱정이 앞선다. 삼봉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오른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경이와, 이제는 다 끝났다는 시원섭섭함에 그 앞에서 한동안을 섰다, 앉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땀이 다 식어 바람을 피해 앉은 큰 바위 아래에서, 나는 그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결국 올라오셨구나. 얼마나 애틋할까. 혼자서만 여행을 다니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정도의 감동일 것이다.
결혼관의 큰 줄기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찾아오는 것이지, 찾아갈 수는 없다는 것. 다만 이제는 “그 일”이 나를 좀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손 정도는 흔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반가운 인연을 맞으러 나간 역전에서 우리가 그러하듯이. 사람의 거의 모든 일에는 양과 음이 같이 다닌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잘 배워왔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양을 원하면 음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결혼이란 그것이 내 삶에 끼칠 영향이 너무 커서, 아마도 나는 이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잘못된 선택을 할까 막연히 두려워 했던 것도 그렇다. 나는 삶의 많은 과제에서 대부분 옳은 선택을 해왔다. 혹은 내가 고른 것이 옳은 것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왔거나.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나였다.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을 없앨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게 맞지, 막연히 두려워 하고만 있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손실회피편향에 대해 배우고 익힌 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부끄러운 일 아닌가.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 남짓이 흘렀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이런 인식의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까.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여행을 다닐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또 배우게 될지, 내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참 기대가 된다. 이 글이 나보다 조금 어리거나, 혹은 내 또래의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이에게 정답,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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