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에서는 오소독스Orthodox라는 말을 씁니다. 주로 오른손잡이가 취하는 자세로, 왼발과 왼손을 앞쪽으로 둡니다. 오소독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정석적인, 전통적인’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집니다. 오른손잡이가 훨씬 흔하고 많으니까, 오소독스하다고 부르던 것이 스탠스의 이름으로 그대로 적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옷 사진을 올려놓고 웬 권투 얘기를 이렇게 하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제 옷차림이 계속 오소독스 했습니다. 권투 선수처럼 빤쓰 한 장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원래 사전적 의미처럼 정해진 규칙에 벗어나지 않게 얌전하게 입고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비교적이요. 그랬더니 제 안의 반골反骨 성향이 또 고개를 슬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날은 좀 얌전하지 않게 입어봤습니다.
허리춤에 뭔가 이쁘장한 게 보이시죠. 폴로의 레지멘탈 타이를 허리띠 대신 맸습니다. 이런 걸 두고 Necktie as a belt라고 이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안무가인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가 많이 연출 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미지에서도 쓰여있듯, 프레드 아스테어의 아이코닉Iconic한 연출이었던 이 Necktie as a belt는, 마이클 잭슨의 명곡 중 하나인 The way you make me feel의 무대의상에 강한 영감을 주게 됩니다.
이날 옷차림을 구성한 의식의 흐름의 출발점은 바로 이 Necktie as a belt에서 시작합니다. 모 패션 커뮤니티에서, 개성이 너무 강하고 튀는 걸 보고 '광대'라고 이른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왕 광대가 되려면 제대로 돼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지요. 처음부터 타이를 고른 건 아니고, 에르메스의 까레90 스카프 사이에서 고민하다 타이를 선택했습니다. 어둡고 무채색의 컬러보다는 쨍한 타이를 골랐습니다. 벨트가 가죽이 아니니, 신발도 구두보다는 스니커즈를 신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날의 날씨가 매우 좋기도 했고, 벨트와 대립 하는 러프함을 좀 섞어주고 싶어 데님 트러커 자켓을 골랐고, 타이트한 자켓과 대비를 주기 위해 와이드한 핏의 코듀로이 바지를 입었습니다. 이너로는 헨리넥을 입고, 반다나를 맸습니다. 모자는 트러커 자켓을 입었으니 트러커를 쓸까 하다가, 별로 노잼일 것 같아서 페도라를 썼습니다.
옷차림의 상세는 아래와 같습니다.
- 페도라 : 볼살리노Borsalino의 비버펠트 소재의 와이드 브림Wide brim 페도라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페도라를 즐겨 썼습니다. 저는 보통 생산적인 용도거나, 제가 좋아하는 물건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물건을 구매해서 오래 아끼고 잘 쓰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에서지요. 이 모자를 살 때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더군요... 페도라의 브랜드는 볼살리노를 최고로 치고, 소재는 비버펠트나 밍크를 최고로 칩니다. 장고 끝에 결국 구매를 하게 되었고, 지금도 아껴가면서 잘 쓰고 있습니다. 아마 뽕은 뽑지 싶습니다.
- 데님 트러커 자켓 : 리바이스의 1세대 데님 트러커 자켓인 506입니다. 깡총한 기장으로 입고 싶기도 했고, 최종 아우터가 아닌 식으로도 많이 연출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좀 타이트 한 사이즈로 구매했던 제품입니다. 덕분에 벨트를 아예 가리지 않고 슬쩍슬쩍 노출할 수 있었습니다. 독특한 형태감이 좋아서 손이 많이 갑니다.
- 이너 : RRL의 헨리넥 셔츠입니다. 톡톡한 재질이 요새 계절과 잘 어울리죠. 러프하고 무심해보이는 분위기에 잘 어울립니다.
- 반다나 : 헨리넥을 입을 때는 목이 훤해서 반다나를 자주 합니다. Fast Color의 갈색 반다나입니다. 갈색이 유독 자주 등장하네요.
- 코듀로의 하의 : J. Press의 제품입니다. 포워드 플리츠Forward pleats가 두 줄이 잡혀있습니다. 폭이 아주 넓어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타이트한 상의와 매치하니 재미있습니다. 백종원 씨가 자주 하는 표현이지요. 재밌네... 근데 이 말 하면 맛 없는 거라는데... 이날 한 벨트의 질감, 색감의 언밸런스한 매치가 좋습니다.
- 벨트 : 상술했듯 폴로의 레지멘탈 타이입니다. 빨강과 노랑, 실패 없는 조합인 듯 싶습니다. 색감도 쨍한 것이 아주 이쁩니다. 하도 많이 매서 지금은 좀 낡았습니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 신발 : 부산의 테일러샵 에르디토에서 구매한 독일군 스니커즈를 모티브로한 신발입니다. 전체가 다 스웨이드 재질인 것이 매우 마음에 들어 구매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착화감도 좋습니다.
이날 입은 옷은 뒷모습에도 힘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포워드 플리츠로 잡혀있는 자켓 등판의 플리츠가 남성적이네요. 신치백도 멋진 디테일입니다. 하의의 왼쪽에만 있는 플랩과 버튼에도 눈길이 가지요.
대강 요런 느낌입니다.
디테일하게는 요렇구요. 여러 번 말하지만 타이와 바지의 색감, 질감의 부조화가 이루는 조화가 참 좋네요. 저는요.
세계 중에서도 아시아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한국이, 한국 사람 중에서도 남자가 옷에 대해서 몰개성이 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그래도 가끔씩은 광대가 되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쨌든 광대 본인은 항상 웃잖아요. 즐거워하잖아요. 저만 즐거우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고 지나친 개성은 억제하는 것 만큼이나, 본인 스스로가 즐거운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개설한 지 며칠만에, 혼자 사진 찍기의 달인이 되었네요. 여러분들도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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