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션

폴로 시어서커 자켓과 Azzurro e marrone - 뱀부 뭐 입지? (002)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지난 3년 간 봄을 잃은 채로 지냈습니다. 한국에는 추운 겨울에 들어와서 춥지 않은 겨울에 다시 떠났습니다. 비교적 날씨에 크게 영향을 받는 저로서는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이제야 한국의 봄을 좀 누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때아닌 역병이 찾아와 몸도 마음도 무거운 요즘입니다. 축 처진 마음을 달래보려고 옷이라도 밝게 입었죠. 어떻게 해야 밝게 입을 수 있을까, 하다가, 제일 먼저 손에 집힌 게 시어서커 자켓이었습니다. 이날 옷차림의 시작점인 셈이지요. 그리고 나서 밝고 깡총한 하의를 찾았고, 자켓과 어우러질만한 셔츠를 고르고 나서 벨트와 신발을 골랐습니다. 이 날의 목적지가 마침 저희 모교 근처였기 때문에, 옳지 싶어서 오랜만에 모교도 방문했습니다.

 

 

서양 복식에서는 이런 걸 보고 Ge-form이라고 부릅니다. 개폼이요,,
뚜벅뚜벅 걷는 모습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뚜벅뚜벅 걷는 모습입니다.
가방을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걷는 모습입니다.

 

이날의 옷차림을 결정한 의식의 흐름은 위에서 말씀드렸으니, 하나하나 소개해 보겠습니다. 

 

  • 대가리 : 풀을 좀 먹였습니다. 
  •  자켓 : 폴로의 시어서커 자켓입니다. 봄과 여름에 리넨과 함께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시어서커 소재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흰색과 하늘색의 자켓입니다. 단추는 흰 자개로 되어있고, 3r2의 형태입니다. 프론트 다트가 없고, 5mm 미싱스티치로 라펠에서 프론트 컷까지 스티치가 박혀있습니다. 전통적인 아이비룩을 따르고 있지요. 후크 벤트가 아닌 것이 아쉽습니다. 소매 버튼은 4개가 달려서 나왔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조만간 두 개를 떼어버릴까 생각중입니다. 지금 여기서 제가 한 말을 보시고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으신 분들은 아래 글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0/03/29 - [패션] - 당신의 아이비리그 룩은 '어센틱'한가?

 

당신의 아이비리그 룩은 '어센틱'한가?

봄이 왔다. 목덜미에 내려앉는 햇살이 따스하다. 코트를 안 입은 지도 꽤 되었다. 길 위의 사람들의 옷이 밝아졌다. 이 봄에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이 뭘까? 그것은 바로 고스룩. 사실 구라고, 글의 제목을 보고..

jooksunn.tistory.com

  • 셔츠 : 많이들 입으시는 폴로의 샴브레이 셔츠입니다. 이 셔츠의 핏은 총 세 가지로 나뉘는데, 품이 넉넉한 순서 대로 클래식 핏, 커스텀 핏, 슬림 핏입니다. 슬림 핏의 셔츠가 한 사이즈 작은 클래식 핏과 동일하다는 말을 어떤 커뮤니티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이즈를 모르시겠다면 꼭 실측과 비교하든, 매장에 내방 하셔서 구매하길 추천 드립니다. 제 생각엔 대부분의 체형은 슬림 핏이나 커스텀 핏으로 선택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유롭고 넉넉한 무드를 연출하고 싶으시다면 클래식 핏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요.
  • 하의 : 리바이스 90s 501입니다. 기장감이 깡총하니 좋게 수선되었습니다. 평소엔 이런 야한 흰색보다는 Off white color를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이날처럼 축축 처지는 날에는 오히려 이런 쨍쨍하게 하얀 흰색이 더 끌리는 듯 싶습니다. 날티와 섹싀는 한 끗 차이인 것 같습니다. 참 어렵지요.
  • 신발 : 알든의 664, 쉘 코도반 태슬 로퍼Tassel loafer의 블랙 컬러입니다. 이날 모교를 방문하는 것이 사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계획에 없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페니 로퍼Penny loafer를 신을 걸 그랬습니다. 그래봤자 아무도 학생으로 안 봐주겠지만요... 흡...🙊(입틀막)
  • 미산가Misanga : 잘 안 보이지만 왼쪽 발목에 마린 패턴의 미산가를 차고 있습니다. 저는 동남아에 갈 때마다 미산가를 삽니다. 이번이 아마 너댓 번째 인 것 같은데, 가장 최근에 쓰던 미산가는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겉면을 둘러싸고 있던 실이 며칠도 안 돼서 다 풀려버리고 가운데에 심지만 달랑달랑 남아있었습니다. 원래 대로라면 이게 또 맛이야, 하면서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차고 다녔을텐데, 얼마 전에 바디프로필을 촬영해야 해서, 사진에 비칠 땐 영 없어보이게 나올까봐 과감히 잘라버리고 새것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미산가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번 묶고나서, 저절로 끊어지거나 풀릴 때까지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데요. 그런데 전 묶을 때는 소원을 빌지만 몇 년이나 차고 다녀서 자연히 끊어질 때가 되면 그 소원이 무언지 기억조차 안 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는 알 턱이 없네요.
  • 반다나 : Fast color의 코튼 100% Made in USA의 빈티지 제품입니다. 이날은 상남자답게 버튼을 두 개 풀고 길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일교차가 심하다 하여 한편으로는 또 소녀마냥 추위에 대비해 반다나도 챙겼습니다. 추워지면 아래 사진처럼 버튼을 다 잠그고 반다나를 맵니다. 세기의 발명품들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이나 현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자연계에, 지구에 존재하는 색인 어스 톤Earth tone들은 눈에 튀거나 거슬리는 법 없이 보는이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푸른색은 하늘과 바다를 닮았고, 밤색은 땅을 닮았죠. 하늘, 바다, 땅을 낯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 조합은 이탈리아인들이 Azzurro e marrone라고 부르며 애용하는 조합이기도 합니다.

요렇게 묶으면 상남자에서 소녀로 문 크리스탈 파워 완성입니다.

 

이날은 용무를 다 마치고 중고 서점에 들러 읽고 싶던 책도 한 권 샀습니다. 따듯한 볕이 눈꺼풀에 내리쬐는 게 참 기분 좋은 날이었지요. 뭍에 올라온 바다거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낮잠이나 한숨 품 자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느라 혼이 났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본 포스팅을 허가 없이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게시하는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퍼가실 땐 꼭 말씀하시고 출처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