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년아저씨
스무 살이 되던 때, 저는 종각에서 친구들과 종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댕댕댕, 종소리와 함께 종각역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다같이 춤추고 강강술래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한바탕 신나게 논 뒤 향한 곳이 어딜까요. 다들 아시겠지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당당하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날이 제 인생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날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요.
스무 살은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과는 그 결을 달리합니다. 20대 초반이라는 한 이름으로 뭉뚱그리기에는 스무 살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 특별해요. 저에게 있어 그런 스무 살의 백미는 역시 대학생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수 윤종신 님의 노래, '오래전 그날'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스무 살의 감상이 잘 드러나 있지요.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학교에는
그 옛날 우리의 모습이 있지
뭔가 분주하게 약속이 많은 스무 살의 설레임
너의 학교 그 앞을 난 가끔 거닐지
일상에 찌들어 갈 때면
우리 슬픈 계산이 없었던 시절
난 만날 수 있을 테니
저의 슬픈 계산이 없던 시절도 꽤 특별했습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대학가를 비틀대던 때, 볕 아래 벤치에 앉아 공전空前의 경제학자의 저서를 처음 읽고 느꼈던 설렘, 짝사랑 하던 여자아이에게 선물을 전해주려 싸락눈을 맞으며 몇 시간이나 기다리던 시간, 용돈이 다 떨어져 점심도 굶은 채 힘없이 터벅터벅 걷던 캠퍼스 뒷길, 어느것 하나 빠짐 없이 모두 예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도 이제 곧 불혹不惑을 바라봅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을 이야기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죠. 모교의 이름이 쓰인 스웻 셔츠를 입기에는 더욱 그렇고요. 지난 번 포스팅(2020/03/30 - [패션] - 동묘 구제 시장에서 빈티지 미제 스웻셔츠(맨투맨) 단돈 만 원 한 장에 사온 썰.txt & jpg)에서, 저는 대학 이름이 들어간 스웻 셔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입은 사람이 의도하든 아니든, 옷은 그의 아이덴티티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교들은 그 이름 자체로도 큰 값어치를 지니고, 로고나 표어 역시 멋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지다 한들, 그 대학과 아무 관계도 없는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옷은 단순히 옷으로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착용 될 때에야,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지요. TPO라는 말을 다들 아시지요. Time, Place, Occasion의 머리글자입니다. 옷을 입을 때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학 이름 외에 어떤 꾸밈도 없는, 오로지 단체복이라는 목적의 달성만을 위하여 생산된 이 스웻 셔츠라도, 누군가의 눈에는 어글리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TPO에 비추어보면 어떨까요. 저처럼 대학일랑 애저녁에 졸업한 인간이, 모교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그것도 시뻘건 색으로 쓰인 옷을 입는 것, 이보다 어글리한 것이 있을까요. 이것이 제가 이 스웻 셔츠로 수박빈티지의 어글리 스웻 챌린지에 참가하게 된 이유입니다.
누군가는 저를 보며 비웃거나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앞으로도 꿋꿋하게 이 어글리한 스웻 셔츠를 즐겨입을 겁니다. 사실은 저도 대학 이름이 들어간 스웻 셔츠를 입고 싶은데, 저와는 상관이 없는 건 입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니까요.
이날 입은 옷차림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길고 지루한 글을 여기까지 다 읽어주신 감사한 분들을 위해, 맨 아래에 서비스 컷을 넣어두었으니, 잠시라도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 셔츠 : J.Press의 빈티지 패치워크 셔츠
- 스웻 셔츠 : 한양대학교 기념품점에서 구매
- 바지 : 리바이스 90's 501
- 신발 : Sperry의 Captain C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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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드러운 사진 바로 밑에다가 이런 말을 쓰자니 좀 머쓱하군요...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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